top of page

소민경 개인전 《포.도.주.》[1]

 

인사말

소민경 개인전 《포.도.주.》를 찾아주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포.도.주.》의 주인공은 소민경 작가가 2016년부터[2] 이어온 포장된[3] 회화[4] ‘lol’ 연작입니다. ‘lol’은 대중적으로 유통되거나 온라인상에서 이동하는 이미지 중 간과된 구석을 유심히 관찰, 수집하면서 시작됩니다[5]. 이미지를 선별하고 자르고 배치하여[6] 회화 작품이 탄생합니다. 이대로 멈추어도 부족함이 없겠으나[7], 작가는 사진, 프린터, 종이를 활용하여 회화 이미지가 복제된[8] 포장지를 만들어 캔버스를 포장합니다. 

lol은 두 개의 ‘l’이 ‘o’을 겹쳐서 감싸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이름입니다. 캔버스와 포장지가 이미지를 가두고 있는 작품[9], 어떤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두 마음, 공간의 벽들이 무언가를 꽉 조이고 있는 상태와 같은 것들이 ‘포(개진). 도(그마). 주(석)’[10]이라는 제목 아래 모여듭니다. 저자 연보의 연도, 옮긴이의 고백, 구두점의 함량 등 ‘내용’과는 무관한 부가 정보[11]가 먼저 마중 나오는 ‹포.도.주.›는 회화의 내부와 외연에 대한 탐구이자 겹쳐지고 복제된 형태로 제시되는 이미지를 대하는 동시대의 ‘보기’와 조응합니다. 

각 작품에서 포장지는 ‘원본’ 회화를 가리는 동시에 예고합니다. 포장지, 껍데기, 외연, 덮개 등 무엇으로 이해하든 ‘그것’이 매개하는 이미지는 대칭적인 구획에 작은 요소들이 자리잡은 모습이거나[12] 고글, 스카프, 모자 등으로 상당 부분을 가린 얼굴[13]입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 갇힌 시간[14]을 느끼거나 벽 사이로 가려진 눈과 마주치는 특별한 경험을 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유지원 드림 

 

---------------

소민경(b. 1984)은 오랫동안 이어 나갈 수 있으나 연결고리가 쉽게 끊어지는 방식으로 미술을 운영하는 중이다. 《포.도.주.》는 《스프레이~!》(2016)에[15] 이은 두 번째 개인전이다.

---------------

 

 

1. <†>, 캔버스에 아크릴, 종이, 잉크, 117*91cm, 2020  

2. <Mask>,린넨에 아크릴, 종이, 잉크, 18*26cm, 2020[16]

3. <X>, 린넨에 아크릴, 종이, 잉크, 117*91cm, 2020

4. <Knit cap>, 린넨에 아크릴, 종이, 잉크, 24.5*33.3cm, 2020

5. <Valley>, 린넨에 아크릴, 종이, 잉크, 100*300cm, 2020[17]

6. <Glasses>, 린넨에 아크릴, 종이, 잉크, 25.5*30cm, 2020

7. <⋕>,린넨에 아크릴, 종이, 잉크, 117*91cm, 2020

8. <Jam>, 종이에 마커, 먹지, 유리병, 16.5*13cm, 2020

9. <Tea>, 종이에 팬, 수채, 도자컵, 42*11.5cm, 2020

10. <Build a wall, my 빵모자will tear it down>, 린넨에 아크릴, 종이, 117*91cm, 2020 

11. <Scarf>, 린넨에 아크릴, 종이, 잉크, 30*30cm, 2020

12. <D>, 종이, 팬, 트레싱지, 실, 41*32cm, 2020

13. <Stitch>, 린넨에 아크릴, 종이, 잉크, 22*27.3cm, 2020[18]

 

[1]2020년 5월 9일부터 6월 7일까지 취미가(서울시 마포구 동교로 17길 96 2층)에서 열렸고, 총 13개의 회화 작품과 도면에는 명시하지 않은 3개의 종이 작업으로 구성되었다. 이 글은 전시 《포.도.주.》에서 배포했던 서문과 도면에 각주를 덧붙인 것이다. 

[2]시작은 포장이 아니라 출력에 있었다. 여러 종류의 종이에 작품이나 자료 이미지를 출력해보다가 마음에 썩 드는 재료를 찾았고, 프린터 잉크가 표면에 맺힌 특유의 질감을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고안한 결과물이 바로‘lol’ 연작이다. 

[3]소민경의 ‘lol’ 연작은 캔버스에 아크릴로 그린 회화를 종이로 감싼 작품이다. 겉의 껍질은 그 속에 있는 이미지가 맺혀 바깥을 향하고 있는 것인 동시에 바깥에서 들어오는 시선이 내부로 뚫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어한다. 껍질을 지시할 수 있는 말이 많지만 내부의 윤곽을 암시하는 동시에 외부의 완전한 침입을 (일시적으로나마) 저지한다는 이중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과 수신자가 가장 먼저 접촉하는 층위라는 점에서 주로 ‘포장’이라고 표현한다. 

[4]‘회화’라고 표기했지만, 회화에 기대되는 물리적 특성, 즉 붓자국이나 명암 처리의 구체적인 현현 등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를 회화가 아니라고 기각할 수 있는 명시적인 근거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lol’은 가장 ‘회화다운 것’이라고 인식되는 속성과 회화로서 최소한 갖추어야 하는 요건, 즉 도그마가 구성하는 전선에 걸쳐져 있다.  

[5]엇비슷한 시대에 드라마, 영화 등 대중문화의 성수에 충분히 적셔졌다면 알아볼 만한 장면들이 1차적 리소스다. 하지만 작가는 대상 이미지가 발생한 맥락, 즉 콘텐츠의 설정, 세계관, 서사 등과 무관하게 배경에 그려진 소품의 일부 혹은 인물과 의상이 겹쳐져 생긴 특유의 각도 등 ‘지엽적’이라 할 수 있는 요소들을 취하여 보관해둔다. 

[6]축적된 이미지는 휴면상태로 있다가 작가가 캔버스에 얹을 것을 전제로 ‘조화롭게’ 혹은 ‘균형감 있게’ 공존할 수 있는 것을 골라 조합할 때 활성화된다. 

[7]포장지 속에는 (완성된) 아크릴 회화가 들어있다. 포장의 단계는 ‘미완성’된 회화를 숨기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과잉보충의 조치이며, 단지 해당 회화가 아니라 회화 일반이 어떤 점에서는 늘 완성인 동시에 미완성일 수밖에 없는 괴로운 자각을 촉발한다. 

[8](작가의 요청에 따라 포장지 제작 단계 중 일부는 기밀에 부친다.) 포장지 제작은 프린터를 활용하여 종이에 안료를 묻히는 과정을 동반한다. 이에 따라 포장지는 얼마든지 복제가 가능하며, 실제로 작가는 최적의 포장지를 얻기 위해 수십 번의 복제 과정을 거친 후, 각 포장지를 비교하여 단 한 장을 선별한다. 

[9]캔버스 위에 그려진 그림과 이를 포장하는 종이가 표상하는 바는 동일하지만, 그 효과는 다르다. ‘lol’ 연작은 이 둘을 존재의 위계가 분명한 원본과 복제본으로 인식하기보다 비본질적인 차이의 관점에서 보고, 둘 사이의 시간과 질감의 진공 상태에 주목한다. 캔버스 위의 그림, 즉 ‘원본’을 굳이 보여주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신비로워서가 아니라 ‘원본’과 ‘복제본’의 차이가 중요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차이가 만들어낸 사이 공간은 후자를 통해서도 충분히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캔버스를 포장한 모습만 제시함으로써, 마땅히 홀로 서야하는 작품을 온전하지 못한, 

즉 벌거벗은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회화는 시간과 공간을 완전하게 얼려버리지 못한다. 그것은 부상을 입고, 닳고, 보호를 필요로 하는 존재이며 바로 이러한 취약성 덕분에 위와 아래, 좌와 우, 앞과 뒤로 연장될 수 있다. 

[10]‘포개진’ 상태는 무언가가 인과에 의해 부착되어 있기보다 단지 임시적으로 덮여 있는 형상을 지시한다. 도그마와 주석은 모두 느슨하게 회화 혹은 회화사를 향하고 있는데, 회화라면 자고로 어떠해야 한다는 견고한 생각이 도그마라면, 그것에 정면으로 반박하기보다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펼쳐 정당성을 의심하도록 만드는 쓰기의 전술이 바로 ‘주석’이다. 하지만 ‘포’와 ‘도’와 ‘주’가 배치되는 순서는 무관하며, 다음과 같이 말을 붙일 수 있다: 포개진 도그마와 주석, 포개진 주석과 도그마, 포개진 도그마에 대한 주석, 포개진 주석에 서린 도그마, 도그마에는 주석이 포개져있다, 주석에는 도그마가 포개져 있다… ∞…

[11]포장지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본질적인 차이 – 미세한 손의 힘 차이에서 오는 형태의 뭉게짐, 프린터의 상태에 따른 색의 바랜 정도나 선명한 정도 등 – 가 결정적으로 작동한다(각주 8 참고). 하지만 《포.도.주.》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러한 부차적인 정황이 가득하다. 이를테면, 이 전시에 대해 기획자와 작가가 처음 대화를 나눈 것이 2018년 12월28일이 아니라2018년12월29일이었고, 준비 과정 중 자주 만났던 작가의 작업실은 ㅅㅅ동이 아니라 ㅇㅎ동에 있다.

[12]이미지 발췌와 화면 구성, 복제와 포장을 지난 4년간 이어오면서, 여러 시도 끝에 동일한 이미지를 다룬 복수의 결과물 사이를 가르는 미세한 차이에 대한 인식이 가다듬어 졌을 것이다. 이에 따라 ‘완성도’에 대한 기준이 귀납적으로 설립된다. 다시 말해, 캔버스 위 최적의 상태에 대한 이상이 구체화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원하는 상태에 더 가까운 작업을 제작하기 위한 기술과 절차가 개발, 수정, 정착된다. 《포.도.주.》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두드러진 영역 구분이 바로 그러한 장치 중 하나다. 《포.도.주.》에서 볼 수 있는 ‘lol’ 연작은 십자, 우물정자, x자, 캔버스를 두르는 띠 등이 도입되어 일정 크기의 도상이 들어갈 수 있는 칸이 나뉘고, 보다 강력한 대칭성이 부여되었다. 이에 따라 삽입된 요소들 또한 대칭적으로 반복되는 양상을 띠고, 여백의 존재가 두드러지게 되었다. 이러한 구획은 포장하는 단계에서 캔버스의 통제를 용이하게 하고, 내구성 및 완성도 향상에 기여한다. 

[13]실제 인물을 옮겨 그리는 일도 종종 있으나, 특유의 포즈나 착장이 부각되는 반면 인물과의 유사성은 부차적이라는 점에서 다시금 요점을 빗나가는 관찰이 적용된다. (5번 각주 참고) lol의 얼굴은 마스크나 고글 등의 장치와 포장지의 효과로 인해 초상 이미지임에도 불구하고 회화에서 얼굴이 으레 발휘하는 불가항력적인 호소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대신 얼굴 또한 다른 ‘lol’의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중첩과 반복가능성, 은폐와 노출의 역동을 드러낸다. 특히 고글은 착용자의 눈을 어느 정도 노출시키는 동시에 이를 보는 사람을 반사해 상이 겹치도록 하여, ‘lol’이 하고자 하는 바를 적절히 전달하는 메타포가 된다. 

[14]캔버스에 그린 무언가를 마치 판박이 스티커나 스텐실처럼 찍거나 발라버린 결과물인 포장지는 그림인 것과 그림이 아닌 것 사이의 물리적인 공간을 확보한다. 나아가 ‘lol’은 전시의 시간, 즉 회화가 ‘본연의 역할’을 하는 시간의 전후로 당겨지거나 밀린 시간의 틈을 내포한다. 회화가 주의력 있는 시선의 대상이 되는 상태는 회화의 생애 중 얼마 되지 않는다. 회화는 많은 시간 동안 수장고나 창고에 보관되며, 간혹 이동, 용도 변경, 폐기 등 다양한 상태를 경험한다. 이때 회화의 표면은 공기와 직접 접촉하기보다 봉인되어 지내는데, 바로 이 봉인 덕분에 홀로 갈 수 없는 곳으로 이동하거나 수명을 연장 받는다. 마치 회화가 머무는 시공간의 구간을 잘라 동결시키듯, 캔버스의 표면 대신 공기와 접촉하여 먼저 산화된 듯 ‘lol’의 포장지는 그것이 감싸고 있는 회화보다 노이즈 레벨을 높인 것 같은 시각적 효과를 자랑한다. 《포.도.주.》에서 포장되지 않은 유일한 회화 작품조차 이를 지지하는 각목과 접합 부위외 더불어 시공간적 연장에 조응한다. 마치 어떤 사건을 준비하듯, 일시적으로 겉옷을 덧입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15]2016년, 연희동 소재 한 주택에서 추석 연휴 동안 전시가 있었다고 한다. 이틀 동안 전시장에 방문한 관객들은 전시를 촬영한 사진과 이에 대한 이야기를 부단히 전했다. 이 전시는 (다른 많은 전시가 그렇겠지만) 직접 본 사람에 비해 풍문으로 접한 이들이 유난히 많은 사건이 되었다.  

[16]2, 4, 6, 11로 표기된 작품은 모두 얼굴을 그린 것으로, 기둥에 가려져 걸음마다 다른 얼굴을 마주쳐 마치 피카부 놀이를 하듯 배치했다. 

[17]종이로 포장된 캔버스는 바니시로 처리된 회화와 달리 빛을 선뜻 흡수하는 성향이 있다. 삼면의 벽에 각각 ‘lol’ 연작이 배치된 영역은 유난히 어두워 보여 T5를 ‘ㄷ’자로 한 줄 더 설치하여 조도를 높였다. 

[18]도면에 표기하지 않았지만, 메모지 사이즈의 드로잉 세 점이 추가되었다. 파란 쪽지 드로잉은 <Tea>가 위치한

기둥의 반대편 면에 붙어, 돌돌 말려 머그컵에 꽂혀 있던 드로잉에 대한 힌트를 제공하고, 빨간 종이와 은박지로 된 드로잉은<Jam>이 위치한 기둥의 반대편 면에 붙어, 투명한 유리병 안에 있는 드로잉을 반복한다. 창문에 붙어 관객을 향하고 있는 쪽지는 창을 바라보고 있어서 관객이 직접 마주할 수 없게 된 페인팅의 축약본에 해당한다. 작가는 이러한 장치를 일종의 ‘재채기’라고 표현한다. 포장지가 물리적으로는 내부 이미지를 가리지만 이에 대한 지표이자 단서 역할을 하듯, 쪽지 드로잉은 컵과 병 속 드로잉과 빵모자 페인팅에 대한 단서로 주어지며 이미지의 겹침을 공간적 차원으로 확장한다. 

  © 2021 All rights reserved by So min kyung.

  © 2023 by Agatha Kronberg. created with Wix.com

  • Grey Instagram Icon

  © 2021 All rights reserved by So min kyung.

  © 2023 by Agatha Kronberg. created with Wix.com

  • Grey Instagram Icon
bottom of page